
상투적으로 쓰였어도 이렇게 저렇게 가끔 그 단어가 딱 맞아 쓸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그을린 사랑을 이야기할때 '기구한 운명'이란 단어가 그럴겁니다. 사실 이 영화가 관객을 압도적으로 끌고가는 것은 주인공 나왈의 기구한 운명일테니까요. 물론 전쟁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나 건조한 풍광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자체도 눈을 잡아끌겠지만 결정적으로는 그 기구함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을 짚어나가는 영화를 만날때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작가와 감독이 무엇을 영화에 담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도 관련이 있는 것인데요 그 사람이 살아나가는 시대입니다. 자칫 우리는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여 그 '사람'의 소위 팔자가 드세다며 동정어린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된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의 영화가 한 개인의 '팔자'만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중요한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회 혹은 시대입니다. 그 영화가 진심으로 전해주고 싶은것이 이쪽일때 단순히 그 사람의 팔자에 대한 동정으로 해석한다면 저급한 동정주의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끝에는 사람이 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지...이 모든것이 팔자이지...나는 저렇지 않아 행복해 라는 순응과 허무가 있습니다. 결코 좋은건 아니지요.
이 이야기를 하는것은 지금 (부정적인 의미로)화제가 되고 있는, 아니 되었었던 마이웨이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그을린 사랑의 주인공은 거의 그리스 신화에 가까운 기구함을 보여주지만 아무튼 한 개인이 시대에 따라 의도치 않게 휩쓸려갔던 비극을 그린다는 점은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로 풀어낼때 얼마나 격이 다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해야겠죠. 어쨌든 이 그을린 사랑은 한 사람의 뒤틀리고 기구한 비극적 운명을 쫓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수작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려면 레바논사태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영화는 직접적으로 배경이 어디인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연극의 극작가가 레바논태생이란 점이나 영화의 몇 몇 장소에서 나부끼던 국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위 아래 빨간 선에 가운데가 희며 어떤 마크가 보이는것은 충분히 레바논을 생각케 합니다. 배우들 얼굴의 이미지도 그렇고 기독민병대와 이슬람 난민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죠. 뭐 혹은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면 굳이 레바논에 한정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게 더 좋죠.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이란겁니다.
그럼에도 혹시 레바논을 모티프로라도 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하죠. 보통 레바논사태를 이야기할때 이스라엘과 PLO간의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훨씬 깊고 방대한 분쟁이 담겨있습니다. 레바논은 2차대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부터 시작된 신생국가이고 대부분의 내전국이 그렇듯 이 열강의 입맛에 따른 무분별한 국가생성으로 민족과 종교가 다른 세력의 알력으로 아슬아슬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어버리자 레바논에 이슬람(회교라는 말은...역사적으로 오래 쓰였다고 하지만 좋지 않습니다.) 난민이 들어왔고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레바논에서는 기독교민병대가 조직되어 난민을 압박합니다. 이러다가 꼬이고 꼬여서 기독교민병대와 이슬람 세력, PLO와 이스라일, 순니파와 시아파 아무튼 모든 내분은 여기서 다 일어나게 되요. 아시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종교세력이란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종교로 세력과 일파를 구분지었을 뿐 종교 자체가 내전의 원인이 되는 수준은 이미 멀리 지나가 버렸으니까요.
그 다음이 그 베이루트 소멸입니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의 수도였던 베이루트를 말 그대로 소멸시켜버립니다. 물론 현재에도 베이루트는 있지만 80년대 이전의 도시구역은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죠.

지루한 역사강의가 뜬금없었을 수 있습니다만 영화는 분명 상당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나왈은 이슬람 난민 청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집안(혹은 집안의 남자)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사회이고 그 완고하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런 일은 사적처형 즉 가족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이슬람권의 특색은 아닙니다. 보수적 일부 사회의 특색이죠. 아무튼 연인은 살해당하고 아이는 출산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도시로 나가 사회에 대해 눈뜬 주인공 나왈은 내전이 심해지자 고아원의 아이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오지 않을것을 예감하고 고향으로 갑니다. 그리곤 기독교민병대가 무슬림이 탄 버스를 잔인하게 사격하고 불태우는 (일반적인 영화에선 보기 힘든 어린이 살해 등도 비춰집니다. 총질과 살해씬이 많지는 않지만 거의 다큐멘타리처럼 건조하면서 섬뜩하게 보여줍니다.)것을 보고 종교와 신념을 버립니다. 그리고는 내전중의 다른 편에 몸을 담고 기독교만병세력의 우두머리를 살해하죠. 그리고 나왈은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요.
(이 정도 내용은 관람에 큰 상관이 없고 아래부터는 스포일링이 있습니다. 다음 사진 아래까지입니다.)
영화 자체는 단순하게 이 나왈을 뒤쫓지 않습니다. 이들의 쌍둥이 남매가 어머니의 유언을 받는것에서 시작하죠. 그들은 불평에(아마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든듯) 가득차면서도 조금씩 특히 딸은 유언을 지킵니다. 뜬금없이 전혀 모르던 오빠와 보지도 못했던 아버지를 찾아가라는 것이지요.
딸인 잔느가 어머니의 고향을 가서 일생을 추적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플래시백으로 어머니의 여정이 펼쳐지죠. 그러면서 조금씩 무서운 진실을 알게됩니다. 이 영화는 정말 숨막히게 압도적으로 흘러가요. 이런 저런 도움과 동생 시몬까지 합세하면서 어머니의 일생이 명확해집니다. 자신들이 알던 아버지 즉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랑했던 난민 남자는 실제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닌것을 그리고 그 난민남자 사이에 태어나서 고아원에 맡겨졌던 배다른 첫째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첫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여기까지도 흥미로운 전개와 참혹한 전쟁, 나왈의 일생이 펼쳐지면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흘러가요. 이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키면서 대위적으로 흘러가는 중후반부까지도요. 하지만 이야기는 드러내지 않았던 또 하나의 줄기를 숨겨놓았다가 펼쳐버립니다. 그 첫째의 삶이죠. 영화의 시작에서 중간에서 잠깐씩 비추었던 어떤 아이-남성의 모습이 그 첫째의 이야기임을 조금씩 암시했었습니다만 수면 위로 등장하면서 폭발합니다. 그 아이는 고아원에 있었고 공격했던 이슬람반군이 끌고가 소년병으로 훈련시켜요. 잔혹한 저격수로 명성을 날릴 정도로 성장한 후 내전중 기독교민병세력에게 잡히고 그들은 이 청년을 죽이지 않고 자신들의 군인으로 전향시킵니다. 그리고는 기독교민병세력의 감옥에서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칩니다. 단순한 고문뿐 아니라 수십명을 괴롭히고 강간하는 그런 괴물로 바뀌죠. 그리고는 전쟁이 어느정도 소강상태가 되자 다른 주인공들이 살던 캐나다로 와서 평범하고 조용히 살아가죠.
어머니 나왈은 기독교민병 우두머리를 죽이고 감옥에 갇히죠. 그리고 십몇년에 걸쳐 무수히 고문당하고 구타당하고 강간당합니다. 그러다 쌍둥이를 임신하고 우연히 마음좋은 간호사에 의해 그 신생아들은 죽여지지 않고 빼돌려집니다. 그들은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 캐나다에 정착합니다. 눈치빠른 분은 이 글로 그 최후의 폭발이 뭔지 눈치채셨을겁니다. 어머니가 너희들이 모르던 그 첫째와 아버지께 전달하라는 편지는 결국 캐나다에서 전달되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된 계기와 그로인한 충격으로 병원신세를 지다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도 알게 되구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밝혔듯 이야기 자체가 다른 의미로는 선정적이고 흥미위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을린 사랑은 그런 저급한 수준이 아니었어요. 시대와 역사가 어떻게 사람을 절망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비극이란게 우리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개인의 위대함은 그런 절망적인 시대 뒤에서도 또 다른 개인을 시대와 비극의 희생자로 인식하고 사람 자체는 용서할 수 있는 그 엄청남에 있다는것을 설파합니다. 시대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분노는 다른 것이죠. 나왈은 말합니다. 지금 함께 살아 있는것은 감사한 일이다. 분노의 흐름은 끊기게 된다. 너의가 지킨 그 약속으로 분노의 흐름이 끊긴다. 어머니가 겪어야 했고 자신들까지 얽힌 그 분노의 흐름을 이 쌍둥이 남매는 이어가지 않고 끊습니다. 일견 담담해 보일 수 있는 엔딩은 그래서 감격적이고 더 아름다워요.
우리가 거의 모르는 캐나다 영화중 백미였습니다. 정말 볼만한 영화였고 강렬한 영화였어요. 놓치지 않고 보게되어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총총







